[프라하 여행 정보] 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프라하 여행 ! 국립 박물관, 바츨라프 광장 그리고 프라하의 봄
프라하 여행의 시작은 뮤제움역에서 하는 것이 좋다.
뮤제움역을 나오면 바츨라프 광장이 펼쳐진다.
<국립 박물관> (Narodni muzeum)
1885년 착공해서 1890년에 완공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 혹은 황제 르네상스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
2층은 역사관, 3층은 자연사.
세계 10대 박물관 중 하나로 뽑힘.
<성 바츨라프 기마상> (Sv. Vaclca)
저 위에 말을 타고 있는 분이 성 바츨라프라는 분으로 10세기에 체코를 지배했던 분입니다.지금의 체코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두 지역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분이 이곳을 지배 했을때는 폴란드 남부 실레지아라는 땅까지 포함해 세군데를 기점으로 땅을 넓혔던 분입니다. 밑에 있는 성 누드밀라(성 바츨라프의 할머니), 성 프로코프(혁명가), 성 보이테크(2번째 주교), 성 아네쥐키(리부세와 같은 전설 속 인물) 네분과 함께 체코가 위기에 처하면 성 바츨라프와 함께 나타나 체코를 지켜준다는 수호 성인들 입니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기마상을 많이 보게 되는데 모양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것은 말이 발을 하나들고 있고, 어떤 것은 말이 두발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성 바츨라프처럼 말이 한 발을 들고 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던 장군을 상징하고, 말이 두발을 들고 있으면 전쟁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을 상징 합니다. 그리고 가끔 말의 네발이 전부 땅에 닿고 있는 게 있는데 그러면 그분은 편안하게 살다가 가신 분이라고 생각 하시면 됩니다.
<바츨라프 광장> (Vaclavske Namesti)
이 기마상 앞에서부터 저 밑에 있는 회색건물 앞까지 760m가 바츨라프 광장입니다.
이 곳을 최초에 성 바츨라프가 만들었는데 광장으로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곡물시장, 마시장,우시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1354년에 까를 4세가 저 밑에 있는 구시가와 이곳을 하나로 뭉치는 커다란 광장을 계획 하면서 지금처럼 광장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광장으로의 변신은 성공하였지만 하나로 합치는 데에는 실패 하면서 지금의 구시가광장과 신시가 광장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프라하의 봄, 얀 팔라치, 벨벳혁명>
이렇게 조성된 이 광장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프라하의 봄’입니다. 프라하의 봄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벗어나 공산화에서 독립을 하려는 독립 운동입니다.그전에 이 곳 체코는 오스트리아와의 30년 종교 전쟁을 통해 270년이라는 세월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국으로 살아 오다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를 1914년 6월 28일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암살하면서 이것을 계기로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해 세르비아와 합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여러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뛰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가 1차 세계대전을 벌이게 되고, 그 전쟁에서 패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립을 하게 되는데 혼자 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옆 나라 슬로바키아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소비에트 연방에 속하게 되면서 공산화가 되는데 개혁파인 둡체크가 제1서기장에 오르면서 둡체크가 ‘인간적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발표 하면서 변화의 바람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소비에트연방에 속한 동유럽 국가에서 독립을 요구할 것을 두려워한 소비에트연방이 강력히 저지하고 나섭니다. 1968년 광장 끝에서 끝까지 사람으로 가득 메워서 시위를 하는데 소비에트 연방이 강력이 막아 섭니다. 탱크를 몰고와 해산할 것을 명령 하는데 해산을 하지 않자 탱크로 밀어 붙이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몸으로 막아내다가 내 친구,내 가족이 내 눈 앞에서 죽어 나가자 겁을 먹게 되면서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체코는 그런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교훈으로 삼게 하는데, 오른쪽 바닦과 왼쪽 바닦을 보시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이 아스팔트로 쭉 내려 오다가 횡단보고를 기점으로 또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지점이 겁에 질린 체코인들이 항보을 선언한 지점입니다.
이렇게 프라하의 봄이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그래도 독립의 의지는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다음해인 1969년 까를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던 ‘얀 팔라치’라는 학생이 다시 시위에 불을 붙이고자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이 학생은 원래 공산주의자 이였으나, 소비에트가 보여준 공산주의의 현실과 이상으로 여겼던 공산주의에 현실적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래서 박물관 중앙 계단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이 붙은채로 이 광장으로 내려와 숨을 거둔 자리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같은 대학 후배인 ‘얀 자이치’라는 사람이 똑같이 이곳에서 분신 자살을 하게 됨으로써 이 두 분을 위해서 제단을 만들게 되었고, 이 두 분의 시신은 안델역 근처에 있는 국립묘지에 안장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에 1977년에 하벨(극작가)이라는 사람이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77헌장이라는 것을 내걸고 민주주의를 갈망 합니다. 1985년 개혁개방 정책이 소련에서 일어나자 동유럽 국가들도 개혁개방의 파도를 타게 됩니다. 그 와중에 1989년 11월17일 ‘자유 민주화 투쟁 기념일’(국제 학생일)을 맞아 개혁 시위를 하던 중 한 학생의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죽게 되자 일반 시민 시위자들이 대거 참여 하면서 대규모의 시위로 발전하게 되고, 공산당 간부들이 전원 사퇴를 하게 되면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비공산주의로 전환되게 됩니다. 이렇게 벨벳 혁명이 성공하고 하벨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됩니다. 그 이후에 민주화를 선언 하면서 이렇게 연설을 합니다. 우리의 혁명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혁명을‘벨벳혁명’이라고 부른다. 민주화가 된지 이제 20년입니다. 민주화가 됐으니까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되는데 다시한번 고통을 겪게 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독립을 할 때 혼자 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로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체코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속국이면서 두 나라의 산업화를 위한 공장이였고, 슬로바키아는 두 나라의 무기 만드는 공장 이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산업화,민주화를 하게 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그러더보니 정치적 영향력에도 차이가 나자, 슬로바키아의 제안으로 신사협정을 맺으면 분리독립을 하게 됩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하벨 시장을 볼 수 있다.
[프라하 여행 정보]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프라하 여행 2편 !
출처: https://memorytraval.tistory.com/16 [메모리트레블: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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